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대신 시럽을 뿌린다면 어떨까.
한겨레출판이 새로운 한국문학의 목소리를 발굴하는 ‘셋셋’ 시리즈의 세 번째 앤솔러지 《상처에 시럽 뿌리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등단이나 문학상을 거치지 않은 신인 작가 6명, 이영주·원영원·강다운·김나은·신은솔·이비가 참여했다. 소설 4편과 시 10편을 통해 가족, 죽음, 단절, 고독, 노동과 연대 등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상처를 각자의 방식으로 들여다본다.
제목부터 독특하다. ‘상처에 소금 뿌리기’를 뒤집은 ‘시럽’은 달콤하지만 끈적하고, 상처를 덮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그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책에서 상처를 바라보는 방식도 그렇다.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하거나 쉽게 위로하는 대신, 불편하고 따끔한 기억을 다시 꺼내 들여다본다.
개 산책을 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린 여자
첫 번째 작품은 이영주의 소설 〈모르는 개 산책〉이다.
주인공은 개 산책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정주부다. 그는 세상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모르는 게 상책’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살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평소의 태도가 흔들린다.
사건을 둘러싼 온라인 댓글에는 범인의 얼굴과 신상을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고 판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 역시 그 사건을 외면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그는 더 이상 ‘모르는 척’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조금은 알고 있는 개 ‘초코’를 데리러 집을 나선다.
평범하게 시작한 개 산책이 살인 사건과 맞물리면서, 이 작품은 ‘타인의 일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모르는 것이 편하다’는 태도에 금이 가는 순간, 주인공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만화가를 꿈꿨던 아버지를 다시 이해하는 아들
원영원의 〈여름의 갈래에서〉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아들은 당시 가족 안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있던 모습을 지켜본다.
시간이 흐른 뒤 아들은 그 여름을 다시 떠올린다. 아버지가 품었던 만화가라는 꿈, 그리고 꿈과 현실 사이에서 점점 벌어졌던 간극을 되짚는다.
‘아버지가 만화가로 성공했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가정은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선명하게 만든다. 결국 아들이 도달하는 곳은 원망이나 후회가 아니라 이해다.
과거의 아버지를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면서, 한 사람의 부모이기 전에 꿈과 좌절을 가진 인간이었던 아버지를 끌어안는 이야기다.
기다리는 사람들, 연결되고 싶은 존재들
강다운은 소설이 아니라 다섯 편의 시로 참여한다.
〈00〉, 〈부러진 문고리〉, 〈새가 없는 공원〉, 〈사각지대〉, 〈울지 마, 빌리〉에는 서로 완전히 맞닿지는 못하지만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술과 담배가 떨어진 집에서 집주인 피에르를 기다리고, 추모공원에서 매일 기도하러 오는 수녀를 기다린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천사의 ‘사라진 날개의 흔적’을 바라보기도 하고,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의 영혼을 마주하기도 한다.
특히 〈사각지대〉에서는 서로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 수 없는 관계가 ‘자꾸만 어긋나는 침대보를 억지로 맞춰보는 일’로 표현된다.
강다운의 시에서 기다림은 단순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다. 단절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몸짓에 가깝다.
15년 만에 돌아온 엄마, 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김나은의 〈좋은 여자〉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정말 끊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주인공 재연에게는 이미 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엄마가 있다. 그런데 15년 만에 엄마가 다시 나타난다. 문제는 엄마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름과 얼굴을 바꾸고, 말기 암 환자가 된 엄마는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여자’라고 불린다.
재연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엄마를 바라보면서 낯섦과 애증을 동시에 느낀다.
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진다. 청년 계좌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엄마와 관계가 단절됐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재연에게는 분명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진 관계지만, 그 사실을 행정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글자와 설명이 필요하다.
가족이 끊어졌다는 것은 무엇일까. 피가 이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계 역시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좋은 여자〉는 병든 엄마와 딸의 재회를 통해 가족의 애증과 단절을 묵직하게 파고든다.
“살아야 하는 거.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거.”
신은솔의 〈그림자 밟기〉에는 외로운 청소년 ‘나’와 이웃집 ‘두정 언니’가 등장한다.
동생의 지병 때문에 부모가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두정 언니에게 의지하게 된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언니와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결국 ‘나’는 두정 언니를 떠나보내게 된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보지 못했던 엄마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어른이 되면 귀신 같은 건 안 무섭죠?”라는 질문에 두정 언니는 이렇게 답한다.
“살아야 하는 거.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거.”
죽음과 상실을 거쳐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사람이 싫어질 만큼 상처받은 사람들이 다시 연결되는 법
마지막으로 이비는 다섯 편의 시를 통해 개인의 상처를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한다.
〈의자가 남는다〉, 〈입〉, 〈또〉, 〈333〉, 〈몸으로 들어가기〉에는 노동과 사회적 관계, 연대의 문제가 등장한다.
‘합의 공장’에서 노동자 위원이나 국선 노무사조차 내 편이 아니라고 느끼는 상황, 목소리를 내라고 하면서 오히려 입을 빼앗는 듯한 상황 등 사회 속에서 연대하려는 과정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33〉에서 화자는 “나는 나의 상주가 되어야지”라고 말한다. 혼자 버텨야 한다는 체념처럼 보이지만, 이비의 시는 결국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특히 〈몸으로 들어가기〉는 ‘사람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히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엇을 해버린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타인과 관계를 끊는 이유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묻는 시선이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치유’가 아니다
《상처에 시럽 뿌리기》의 여섯 작가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쓴다.
살인 사건을 마주한 가정주부,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아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15년 만에 돌아온 엄마를 마주한 딸, 죽음 이후 엄마의 그림자를 이해하게 되는 사람, 그리고 사회적 상처 속에서도 연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완벽한 해답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시럽은 약이 아니다. 상처를 완전히 낫게 하지도 않는다. 다만 잠시 상처를 보호하고, 그곳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상처에 시럽을 뿌리는 일’은 결국 아픈 기억을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는 일이다.
소설가 박민정·임선우와 시인 김근·이기리가 추천한 《상처에 시럽 뿌리기》는 그렇게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섯 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건네는 첫 번째 목소리다.
책을 덮자 질문이 하나 남는다.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의 상처를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을까.